[정신의학신문 : 김지용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C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방송 잘 듣고 있는 40대 여자입니다.
저는 대학원 졸업 후 캠퍼스 커플이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 낳고 기르면서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하는 평범한 아줌마입니다. 그런데 남편과의 관계가 결혼 초반부터 삐걱거리더니, 지금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려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결혼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어요. 자기 주장이 강하고 논리적이고 철저히 남녀평등주의자이던 제 이야기에 항상 깊은 공감을 표하며 반응도 적극적으로 해주곤 했었는데, 결혼 후 바로 본색이 드러나더군요.
남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취를 해서 그런지TV를 켠 채로 잔다거나, 아무데나 옷을 벗어 놓는 등 생활 습관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로 충돌하면 처음엔 별 대꾸나 말도 없이 무시하듯 듣다가, 갑자기 저의 말하는 태도나 목소리 톤, 손짓이 맘에 안 든다고 화를 내고, 급기야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때릴 듯 위협하며 심한 욕을 마구 내뱉는 겁니다. 실제로 저를 때린 적은 없지만요. 그러다가 도저히 화를 못 참겠다 싶으면 문을 꽝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가 1시간 정도 지난 후 들어오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웃으며 말을 걸고 애교 부리며 사과를 합니다. 전 전혀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들러붙는 남편에게 지쳐서 그냥 적당히 넘어가거나 못이기는 척 받아주곤 했을 뿐 갈등 상황들은 전혀 나아지는 게 없었죠. 전 정말 연애 땐 그렇게 포용력 있고 예의 바르던 남편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거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제 자존감이 정말 형편없이 낮아지더군요. 집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소통하는 사람이 남편 밖에 없다보니, ‘남편 말대로 내가 이상한건가? 내가 정말 못 배워먹고 기본이 안 되어 있는건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그즈음 한 2년 정도는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게, 아마도 우울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이후 수렁에서 빠져나와 내 삶을 찾자고 프리랜서 일도 찾고 운동도 하며 삶에서 남편의 비중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남편의 폭력에는 이혼까지 불사하며 단호히 대응했고, 저도 전략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고 욕도 하기 시작했더니 폭력적인 모습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최근2년 정도는 한 달에 한 번이나 욕할까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갈등은 남편의 잔소리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무조건 남을 너무 무시하고 비난하는 방식이고, 제게 잔소리할 때의 남편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저를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 같아 자존감이 손상 받게 됩니다. 얼마 전 같이 대형마트에서 같이 장을 보고 주차장에 짐을 들고 가는 중이었어요. 남편은 양손에 가득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고 저 역시도 양손에 다 짐을 들고 있었는데, 엄청 짜증난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그러더니 저희 차 앞에서 갑자기 짐을 확 내려놓고 절 째려보며 ‘진짜 센스도 없다. 저런 걸 여자라고…내가 이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가면 알아서 내 주머니에서 차 키를 미리 빼서 문을 열어놓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런 건 알아서 해야지, 센스는 없고 말만 시끄러운 미친년…’ 이라며 계속 잔소리를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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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그런데도 제가 이 사람이랑 지금껏 살고 있는 건, 화를 내지 않을 때의 이 사람은 참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입니다. 또 신기하게도 가족을 엄청 생각하는 듯이 보입니다. 기분 좋을 땐 아이들한테도 다정하게 말 걸고, 주말이면 같이 운동도 나가구요. 친구와도 거의 안 만나고 자신의 원가족들과도 사이가 별로인데, 미래를 생각할 때 항상 ‘우리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또 회사에서는 능력이 정말 출중해서 인사고과가 항상 1등이고, 너무 1등만 해서 안된다고 가끔 일부러 2등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점점 나아가는 게 보여서 참고 있습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천사같이 느껴질 정도니까요.
좀 횡설수설하게 되는데 제가 남편에게 느끼는 불안감의 본질은 남편의 도덕적인 잣대, 양심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남에게 걸리지만 않는다면, 내 맘대로 해도 된다. 나쁜 일 해도 상관없다. 약자나 모자란 인간들은 무시해도 된다'라는 식의 슈퍼에고를 가지고 있는지 직장 상사들에게는 그렇게 예의 바를 수 없는데,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숟가락 더럽다고 클레임 걸 때는 눈빛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면서 정말 예의 없고 무시하는 말투로 말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이해가 안됩니다. 심하지는 않겠지만...그... 흔히 말하는 소시오패스 같은 거 아닌가요? 공감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닙니다. 차근차근 이야기하면 이해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 나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요즘 느끼는 진짜 문제는, 제가 지쳤는지 남편에게 믿음이나 신뢰, 애정이 이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남편을 변화시켜보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했었는데, 이제는 노력하기도 싫습니다. 그래도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아이들도 나중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이 사람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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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결혼 전에는 엄청난 공감을 보여주던 남편의 결혼 직후 돌변한 모습에 정말 글로는 다 표현하지 못했을 큰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아요. 남편의 지속적인 학대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져 우울증을 경험하신 후 자신의 삶에서 남편이 차지하는 부분을 줄여나가며 극복하셨다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고요. 보통 이런 악성 관계가 시작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나빠지는 경우가 더 많은데, C씨께서 현명하게 대처하신 덕분에 10년 전에 비해 많은 부분들이 좋아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 오랜 기간을 버텨오며 아이들을 위해서 어떻게든 남편을 바꿔보고 가정을 유지하려 하신다니 책임감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 같으면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연 글에 적어주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남편의 경우 외현적 정신화(mentalization) 능력이 부족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할 때 자동적으로 머리에 떠오르기도 하고, 집중해서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하고 의식적으로 생각해보려 할 때도 있잖아요? 그것을 각각 내면적 정신화와 외현적 정신화라고 부릅니다. 성찰하지 않은 채 직감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는 내면적 정신화와 달리, 외현적 정신화는 자신과 그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상대에 대해 의식적으로 심사숙고해서 알아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차장에서의 상황을 보면, 그 당시 남편 분이 갑자기 C씨에게 화를 낸 것은 내현적 정신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기 전에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 한 번 정리를 할 수도 있겠죠? ‘아내가 미리 차 문을 열어주지 못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아내도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있었구나. 내가 성급하게 엉뚱한 화를 낼 뻔했구나’ 같은 식으로요. 이렇게 나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집중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외현적 정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 분께서 왜 외현적 정신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저희가 사연의 내용만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제대로 된 공감을 받지 못한 경우에 외현적 정신화보다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내면적 정신화를 쉽게 하게 됩니다. 금방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등 감정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작은 감정그릇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죠. 남편 분이 원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어려서부터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교육받지 못하고 공감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가족’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아낀다고 하셨잖아요. 만약 남편 분께서 어릴 적에 부모님의 이혼이나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상황처럼 가정이 해체될 위기를 겪으셨다면, 그만큼 지금의 가정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크실 것 같아요. 또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줘서 외현적 정신화 과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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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현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편 분의 반복적인 정신화 연습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반사회적 경향이 심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화는 내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한 발자국 뒤에서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 어떻게 보면 명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남편 분께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우선 남편 분과 한 가지 약속을 하시기를 권유드려요. 그 약속은 화를 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C씨께서 신호를 주면 잠시간 멈추기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남편 분의 생각이나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도록 해 보시는 거죠.
이러한 정신화 연습을 환자 분과 하는 것은 저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에게도 힘든 일이니만큼, C씨께서 직접 하시는 것은 정말 어려우실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연습이 가정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부부상담이나 각각의 개인상담을 전문가에게 받겠다는 약속도 받으시는 걸 권유드려요. 지난 10년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셨어요. 지금처럼 지치신 게 너무나 당연하고, 지금까지 버텨오신 것 자체가 저희에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앞으로는 혼자서 모든 어려움을 다 가지고 가시는 것보다 필요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신다면 덜 지치시고, 남편과의 신뢰 관계를 되돌릴 실마리도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뇌부자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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